2013년 11월 13일 수요일
(야설명작)러브타임4
화면이 바뀌고, 이번에 나온 마릴린 먼로의 상대는 밀튼 버얼. 자료
집을 뒤져보니 당시의 유명한 코미디언이다.
"당신은 참 재미있군요."
"섹스도 참 재미있게 한다오."
"어떻게?"
"그대가 원하는 만큼 재미있게."
"저는 따로 원하는 걸 정해 놓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의 창
조적인 것을 원하겠어요. 창조적인 섹스만이 예술이라고 할 수 있으니
까요."
"하하하…역시 그대는 색깔이 다르군. 자, 그럼 시작할까?"
버얼은 먼로의 몸 위로 올라가 거꾸로 엎드린다. 69 체위를 시작할
모양이다. 그런데 둘 다 옷을 벗지 않은 상태.
"왜 옷을 벗지 않고 시작하는 거지요?"
"이게 바로 창조적인 전희(前戱)라는 거요. 한 꺼풀 한 꺼풀 벗겨갈
때의 신비스러움이란 거 있지 않소. 그걸 다 맛보자는 거요."
"역시!"
"그대는 나의 바지를 반쯤 벗겨내리고 팬티의 가랑이 틈으로 나의
회음부를 엿보도록 해요. 나는 나대로 당신의 신비스러움을 엿볼 테니
까."
"당신의 노하우는 참으로 놀랍군요!"
먼로의 얼굴에 백치미가 가득 퍼진다.
그 때 갑자기 호출기의 벨이 울린다. 나의 휴대용 호출기가 아니라,
이 방 안에 장치된 러브타임머신 여행사의 것이다. 나는 리모콘으로
벽면의 정사 장면을 없애고는 호출기를 작동시킨다. 음성 녹음이다.
"박사님, 저는 백국남입니다. 이곳의 엄청난 폭우가 아직 그치지 않
아서 당장에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폭우 때문에 바다를 건
너지 못해서 아직 심학규 씨를 데려오지 못했으니까요. 아무래도 48시
간을 거의 다 채우고 나서야 복귀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다시 연락드
리겠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 이곳에 머물러 있을 필요도 없는 노릇. 한시바
삐 옹녀가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오만불 박사에게 전화
를 건다.
"오만불입니다."
"천래성입니다. 방금 백국남 씨한테서 호출이 와서…."
나는 오만불 박사에게 백국남의 음성 메모를 들려준다.
"그렇담 자네가 굳이 거기 남아 있을 필요도 없겠군. 어서 돌아가서
옹녀가 잘 있는가 확인해 보도록 하게. 문단속 비밀번호는 말이야…."
나는 오만불 박사가 알려준 비밀번호를 조작하여 문을 견고하게 닫
아 놓고는 잰걸음으로 지하철역을 향하여 움직인다. 지하철역에서 지
하철 전동차를 이용하여 종점까지 간 다음, 거기서 다시 좌석버스를
타고 움직인다. 좌석버스에서 내려, 다시 잰걸음으로. 주인집의 고추밭
이 보인다. 고추밭에 다다르자,
"어딜 다녀 오우? 며칠간 안 보이던데."
하고 밭에서 일하던 주인집 아줌마가 묻는다.
"부모님을 좀 뵙고 왔습니다."
"잘했수. 일하는 것두 중요하지만, 이따금 부모님헌테 인사도 드려야
지."
주인집 아줌마의 태도로 보아서, 다행히 옹녀에게 별일은 없었던 모
양이다.
"들어가겠습니다."
"그래요. 먹을 것 잘 챙겨 먹고."
앞으로는 옹녀가 이 생활에 익숙해지면 잘 챙겨 줄 것이다. 아니, 오
히려 내가 옹녀를 챙겨 먹이려 들지도 모른다.
마당에 당도하자, 쭈그리고 앉아 파를 다듬고 있던 한 셋방 아줌마
가 돌아본다. 트럭 운전수의 아내인데, 제법 섹시하게 생겼다. 이따금
섹시한 아내를 둔 그녀의 남편이 부러울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옹녀가 있는 것이다. 나는 얼른 발을 움직여 나
의 셋방 앞으로 간다.
곧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간다. 입식 부엌을 지나 방문을 연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옹녀, 어디 있소?"
나는 남들이 들을까봐 작은 소리로 묻는다. 그러자 침대 밑에서 소
리가 난다.
"여기야요, 래성 씨…."
맙소사. 그녀는 침대 밑에 숨어 들어가 있는 게 아닌가.
"어서 나와요. 거긴 왜 들어갔소?"
그녀는 침대 밑에서 기어나오며 한숨을 내쉰다.
"저 요망할 귀신 때문에…."
그녀가 가리키는 건 전화기다. 그랬었군, 역시 그랬었군. 전화벨이
울려서 숨어 버렸었군.
"옹녀. 이건 전화라고 하는 거요."
"전화가 대관절 뭐야요?"
"이건 말이오…."
나는 옹녀에게 전화에 대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준다.
"당신이 사는 세상은 정말 복잡하구만요."
그런 옹녀의 순박함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사랑하오, 옹녀."
나는 그녀를 꼬옥 껴안아 준다. 나는 그녀에게 분명히 자신있게 말
할 수 있다. 가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나는 변강쇠보다
천만 배 나은 남자라고.
이튿날, 나는 긴 생머리에 양장 차림으로 변신한 그녀를 데리고 외
출을 한다. 다행히 주인집 아줌마나 트럭 운전사의 부인과는 마주치지
않았는데, 또다른 셋집인 뚱뚱이 아줌마와 마주친다.
"어머나, 누구예요?"
"헤헤…약혼녀예요."
"어쩜 저렇게 고울 수가…."
나는 한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마당을 빠
져나간다. 내가 옹녀와 함께 가려는 장소는 러브타임머신 여행사. 나는
오만불 박사와 손잡고 일하기로 결심을 한 것이다. 옹녀를 행복하게
해 주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듯싶었다. 우선 돈벌이가 중요하니
까. 그리고 당분간은 옹녀와 함께 출근하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퇴근길
에 여기저기 들러 하나하나 세상물정을 가르쳐 줄 셈이다.
"그래, 잘 생각했네."
오만불 박사가 몹시 반긴다.
"백국남 씨와 심청이는 당도했습니까?"
"아니, 아직 오지 않았네. 폭우가 엄청나서 여전히 무인도에 갇혀 있
네. 처음에는 잘 나가는 듯싶더니, 자네처럼 마냥 운이 좋지는 못한 모
양이야."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걱정이군요."
"잘 되길 빌어야지 어쩌겠나."
"오늘은 황진이를 만나러 갈 손님이 있다고 하셨나요?"
"그렇네. 신춘문예 3관왕 출신의 시인이야. 이름이 관박식이라고 하
지."
"성이 특이해서 그런지 들어 본 것 같네요. 아,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 있어요. 무슨 문화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제법 유명한 시인일세. 그러니 황진이 자료집을 찾아 보고
비디오 화면을 익혀 두면서 미리 준비해 놓도록 하게. 나는 자네에게
줄 연봉도 준비할 겸 나갔다 올 테니까, 나 대신에 자네가 기다렸다가
손님을 맞도록 하게."
"다녀오십시오."
오만불 박사가 나가고 나자, 나는 자료집을 준비하여 옹녀와 함께
소파에 엉덩이를 묻는다. 그리고 벽면에 비디오 화면을 만들어 가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보다가 만 마릴린 먼로의 성생활이 궁금하기
는 하지만, 지금 그것을 한가롭게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선 급한
게 황진이인 것이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벨이 울리고 시인 관박식의 얼굴이 비디오폰에
나타난다. 문을 열어준다. 시인 관박식은 이조 시대 선비의 차림새를
하고 있다. 콧수염과 턱수염도 적당히 길러서 그럴 듯하다.
"어디, 우선 황진이의 미모 좀 봅시다. 가만, 이 분은 누구람?"
"예. 저의 약혼녀 되는 여자입니다."
"그 참 미인이오. 황진이가 이 분만 할까?"
"예, 잠시 기다리십시오."
나는 미리 황진이의 자료집을 보고 비디오 화면을 보며 익혀 두었던
대로 진행해 나간다.
"먼저 황진이가 태어난 사연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 날 한 양가
집 규수가 타관에서 개경(開京) 유람을 온 한 남자를 우물가에서 우연
히 만나게 되었지요. 그 남자의 성은 황씨(黃氏)요, 진사에 급제한 경
력이 있었습니다. 여인은 그 황진사에게 흠뻑 빠져서 몸을 내주었지요.
그런데 그 황진사는 아이를 갖게 해놓고는 사라져 버렸고, 여인은 집
안 어른들의 구박을 받으며 계집아이를 낳았습니다. 계집아이의 이름
은 명월(明月). 여인이 딸의 이름을 그렇게 지은 데는 이유가 있지요.
꿈에 달을 삼키고 아이를 낳았던 겁니다. 그런데 뒤에 이름을 진이(眞
伊)로 바꾸었습니다. 서출(庶出)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양반인 황진사의
딸이므로 성과 이름을 더하면 황진이."
이 정도면 나는 제법 이 일에 소질이 있는 셈이다. 나는 스스로의
이야기꾼 재능에 놀란다. 하지만 남자 이야기라면 이야기 전개에 형편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아리따운 여자에 얽힌 이야기니까 자료를
읽는 데도 지루해 하지 않고 꼬박꼬박 기억하고 있을 테지. 나는 이야
기를 계속 끌고 나간다.
"어느덧 황진이의 나이가 열여섯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황진이에 관
한 소문이 고장에 가득 퍼졌습니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깨우칠 정
도로 총명하여, 다섯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시서화(詩書畵)와 음률
(音律), 그리고 시가(詩歌)는 어느덧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
입니다. 더구나 그 빼어난 미모라니."
황진이의 빼어난 미모에 대해서는 잠시 후에 화면을 보여 줘야지 따
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온갖 미사여구로도 수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아마 황진이 본인쯤 되어야 가능할지 모른다. 하기야 황진이의 사람됨
으로 미루어 자화자찬할 리야 없겠지만.
"비록 서출이기는 하지만 문장이 능한 데다 빼어난 미인인지라 여기
저기서 혼담이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혼담은 모두 어머니의 마음을 움
직이지 못했습니다. 빼어난 딸을 좋은 집안에 시집 보내려 하는 것은
당연한 어머니 마음. 그런데 서출이라는 이유로 남자의 집안이 다 그
렇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자, 이번엔 화면을
보십시오."
나는 리모콘을 조작하여 벽면에 화면을 만들어낸다.
황진이의 방 안. 황진이가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 열여섯
에 이르자 혼담이 자주 들어오기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해진 모양이다.
"저 여자가 바로 황진입니다."
"과연!"
나의 설명에 관박식 씨가 크게 놀란다.
"역대 미스코리아 가운데도 저만한 미인은 본 일이 없소. 경솔하지
않은 아리따움이라고나 할까…하지만 선생의 약혼녀와는 누가 더 미모
인지 그 등위를 헤아릴 수가 없구료."
화면에 둔 관박식 씨의 눈이 더욱 커진다.
방문 밖에서 몸종인 삼월이가 호들갑스럽게 황진이를 부른다. 신분
이 노비라서 흠이지, 황진이와 동갑내기인 삼월이도 얼굴만큼은 보름
달덩이처럼 훤하다.
"아씨! 경사가 났어요, 경사가!"
황진이가 천천히 문을 열고 묻는다.
"대관절 무슨 경사인데 이다지도 호들갑스럽다지?"
"윤판서(尹判書)댁에서 매파를 보내 왔어요."
"윤판서댁? 윤판서댁이라면 송도(松都) 제일의 명문가가 아니니?"
"예. 그러니까 경사가 났다는 거지요."
"어찌된 사연인지 좀더 자세히 알려 주겠니?"
"글쎄, 얼마 전에 아씨가 흥국사(興國寺)에 불공을 드리러 간 일이
있잖아요."
"응, 있었지."
"그 때 윤판서 대감님 아드님이 아씨를 보고 한눈에 뿅 간 거래요."
"그래서?"
"그래서는 뭐요? 어머님을 졸라 매파를 보냈던 게지요."
"그 분이라면 얼마 전에 장원급제했다지 않니?"
"예. 그러니까 더욱 경사라니까요."
"휴우…."
실로 엄청난 가문이니, 서출인 자신이 며느리감으로 가능하지 않을
거라고 예견했던 것일까? 황진이는 삼월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정도
로 길게 한숨을 내쉰다.
이튿날.
황진이와 어머니가 한방에 앉아 시집갈 준비 때문에 이야기를 나누
고 있는데, 문밖에서 삼월이가 큰소리로 매파가 다시 왔음을 알린다.
잠시 후, 방안으로 들어선 매파가 깜짝 놀랄 소식을 알린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 계시던 윤판서 대감 어른이 돌아와 하시는 말
씀이…겨우 진사 따위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자식인데다 서출에 불과한
아이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다니, 절대로 안 된다…하시는 거였지요. 그
러니 이번 혼담은 없던 걸로 알아 두세요."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쉰다.
"너를 서출로 내놓는 바람에 첩의 자식 소릴 듣게 하는 것도 서러운
데, 먼저 제의한 혼담을 하루 아침에 번복하다니, 이게 무슨 꼴이란 말
이냐."
이번엔 꺼이꺼이 울음마저 내쏟는다.
"어머니, 진정하셔요. 재산이 많거나 문벌이 당당하면 뭘 하나요? 사
람 됨됨이가 더 중요한 것이죠. 아무리 재산이 많고 권세가 있는 집안
의 남자라고 해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어찌 평생을 함께 살 수가 있을
까요? 함께 시를 짓고 읊으며 살 수 있는 상대는 되어야 하지 않겠어
요."
황진이가 위로하지만, 갈갈이 찢겨진 어머니 마음이 회복되긴 어렵
다.
나는 이쯤에서 리모콘을 조작하여 화면을 바꾼다.
몹시 무더운 어느 날 밤의 안마당. 황진이가 삼월이의 도움으로 목
욕을 하고 있다. 우물에서 길러 온 물동이의 물을 삼월이가 바가지로
퍼내어 황진이의 알몸에 부어 주는 식이다. 어두운 밤이라 황진이의
알몸은 잘 보이지 않지만, 마치 옥(玉)으로 빚어 놓은 듯 매끈하게 느
껴진다.
"아, 좋다."
황진이의 낭랑한 음성이 밤하늘에 울려퍼진다. 황진이의 알몸을 엿
보던 초승달이 되레 부끄러운지 구름 속에 가느다란 몸을 숨긴다.
"이제 그만 하자."
황진이가 물기에 싸여 있는 알몸을 닦고 있을 때, 갑자기 담벼락 위
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ㄴ?"
삼월이가 발끈하여 소리친다. 후다닥 내빼는 소리는 금세 멀리 사라
져 버린다.
"감히 우리 아씨의 옥체(玉體)를 엿보다니!"
"됐다, 삼월아. 한밤중인데 무엇이 보였겠니? 그만 들어가자."
황진이가 삼월이를 타이르고, 잠시 후 신분이 다른 두 미녀는 마당
을 가로질러 방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다시 리모콘을 조작하여 화면을 바꾼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한번 가면 못 오누나
우워남사 우워호
북망산(北邙山)이 멀다더니
바로 문앞이 저승일세
우워남사 우워호
저승길을 나섰건만
님 그리워 못 가겠소
우워남사 우워호…"
누가 죽었을까?
상두꾼들의 구슬픈 노랫소리와 쩔렁거리는 방울 소리에, 난초(蘭草)
를 치던 황진이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든다. 황진이는 처음 화면에 잡
혔을 때보다 더욱 곱다. 열여섯의 나이가 바야흐로 무르익기 시작한
것이다.
황진이는 미닫이 창호지문을 밀어서 열어본다. 하늘에도 감나무에도
가을이 타오르고 있다. 그리고 타오르는 가을을 바라보는 황진이의 얼
굴에도 가을이 타오르고 있다.
구름 하나가 감나무 가지 사이로 지나간다. 그 때 삼월이가 늘 그렇
듯이 호들갑스럽게 달려오며 소리친다.
"아씨, 아씨!"
"무슨 일이냐?"
"참 이상한 일이 다 있어요!"
"무슨 일인데 이다지도 야단이니?"
"우리집 대문 밖에서 큰일이 났어요!"
"싸움이라도 났단 말이냐?"
"그게 아니라요. 상여가요, 글쎄…."
"상여가 왜?"
"상여가 글쎄, 대문 앞에서 별안간 멈추더니 꿈쩍도 하지 않는 거예
요."
"일부러 세우지도 않았는데 멈추었단 말이냐?"
"대문 앞을 지나는데, 상두꾼들이 아무리 기운을 써도 제멋대로 움
직이지 않는 거예요."
"정말이냐?"
"글쎄, 지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니까요."
"그렇담…참으로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구나."
그런데 잠시 후, 이번엔 안잠자기 아줌마가 황진이를 찾는다.
"아씨,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멈춰 선 상여 때문인가요?"
"글쎄, 상가집 노인이 아씨를 뵙자고 떼를 쓰니…이를 어쩝니까?"
"왜 그런다죠?"
"아씨께 꼭 드릴 말씀이 있다는 겁니다."
"나한테 직접? 참, 어머니는 아니 계신가요?"
"아침 일찍 절에 가셨어요."
"참, 그렇지."
"어떻게 할까요, 아씨?"
"하는 수 없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어서 그 노인을 이리로 모
셔 와요."
"노인을 데려오라고 하셨나요? 만일 그 노인에게 귀신이 씌워 있으
면 어쩌시려구요? 마님이 아시면 크게 노하실 것입니다."
"상여가 움직이지 않는데 그냥 둘 순 없어요. 무슨 사연이 있나 한
번 들어봐야죠."
잠시 후 안잠자기의 안내를 받아 백발 노인이 들어온다.
"그래, 어인 일이십니까?"
"이 늙은이는 아랫마을에 사는 박가라고 합니다. 천한 주제에 감히
아가씨를 뵙자고 하여 면목이 없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지 말씀을 해 보시죠."
노인은 우선 한숨부터 내쉰다. 이어서 말을 꺼내는데,
"문밖에 멈춘 상여의 주인이 이 늙은이의 장손(長孫)이올습니다. 그
런데 그놈이 죽게 된 사연이 참으로 한심해서…글쎄, 우연히 아가씨를
뵙고는 상사병에 걸렸습죠."
황진이의 안색이 변한다. 어쩌면 그가 바로 목욕하던 황진이를 훔쳐
본 사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꾸짖었습죠. 이놈아, 아무리 무식타 해도,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라는 옛말도 모르느냐? 소작농(小作農) 주제에 감히 황진사댁
따님을 넘보다니…그러나 꾸지람을 듣고서도 그놈의 병세는 깊어져만
갔습죠. 식음을 전폐하고 곧 죽을 판국이라, 이 늙은이가 하는 수 없이
매파를 놓아 보았죠습죠. 그런데 매파는 어림없는 수작일랑 부리지 말
라고 마님한테 혼구멍이 나서 헐레벌떡 돌아오고 말았습죠. 그런데 이
미련한 놈이 아가씨를 찾으며 신음만 하다가 끝내…."
노인은 말끝을 흐리다가 그만 눈물을 쏟아낸다.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결국 소녀가 멀쩡한 한 남자를 죽인 셈이
되었군요.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영손(領孫)이 살아 있을
것을."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건 어디까지나 그놈이 칠칠치 못해서 생긴
죽음입니다."
"아무튼 이제 영손의 생명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그럼 이제는 어
쩐다죠?"
"그놈의 혼백을 아가씨께서 달래만 주신다면 혹시 상여가 움직일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죠."
"그럼 어떤 식으로 영손의 혼백을 달래야 할까요?"
"이 늙은이도 어디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도 못한
일이라…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말씀해 보세요."
"아가씨께서 대문 밖까지 나가시어 망자(亡者)의 넋을 달래시며 몸
에 지니셨던 물품을 상여에 얹어 주시면 어떨까요?"
노인의 말을 듣고 황진이는 깊은 생각에 잠겨든다. 규중 처녀의 몸
으로 외간 남자의 시신 앞에 나아가라니…더욱이 몸에 지니고 있는 물
품을 선사하라니…아마도 그 문제로 고민하는 듯하다.
"이 늙은이의 소청을 부디 들어 주십시오, 아가씨. 망자의 한(恨)을
오래 묵히면 살(煞)이 된다는데…공연히 이 집안에 재앙이 깃들까 두
렵습니다."
노인은 무릎 꿇고 엎드려 사정을 하며 숫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
다. 휴머니스트적인 속성을 지닌 황진이는 참으로 난처한 표정이 된다.
"일어나셔요, 영감님. 제가 망자의 넋을 달래 보겠으니 영감님은 나
가서 기다리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평생토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
니다."
노인은 땅바닥에 몇 번이고 엎드려 절을 한 뒤에 밖으로 나간다.
"아이고, 아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마님께 꾸중을 들으시려구요…."
"아씨의 옥체를 아끼셔야지요…."
안잠자기가 울상이 되어 말리고, 삼월이가 더욱 울상이 되어 거듭
말린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산 사람 소원은 못 들어줘도 죽은 사람
소원만큼은 들어줘야 하지요."
황진이는 안잠자기와 삼월이를 돌려보내 놓고, 턱을 만지고 방안을
서성이며 궁리하다가, 갑자기 저고리를 벗고서 치마끈을 푼다. 그러더
니 이번엔 아예 속치마를 벗는다. 그러고는 벗은 속치마를 방바닥에
펼쳐 놓고 붓을 들어 제축문(祭祝文)을 써나간다. 그런데 이 제축문 내
용이 유별나다. 저승에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자는 것이 아닌가.
잠시 후 황진이는 제축문이 적힌 속치마를 들고 문 밖으로 나가 상
여 위에 덮고는 혼백을 달랜다.
그런데 정말 놀랄 일이 벌어진다. 상여가 움직이는 것이다.
나는 리모콘을 움직여 화면을 지운다. 그러고는 다음 대목을 말한다.
"이 일로, 황진이가 보잘것 없는 집안의 죽은 총각과 영혼 결혼을
했다는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졌지요. 그 바람에 황진이의 혼삿길은
꽉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딸의 경솔한 행동을 원망하던 어머니는
끝내 몸져 눕고, 황진이도 시름시름 앓기는 마찬가지…어떤 이는 황진
이에게 무당혼이 내리고 있다고까지 말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황진이
가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다시 화면을 보시죠."
나는 다시 리모콘을 작동하여 벽면에 화면을 만들어 낸다.
"얘, 삼월아!"
"예, 아씨!"
황진이가 앓아 눕자 툇마루에 앉아 세월을 보내던 삼월이가 기뻐하
며 쪼르르 방안으로 기어들어간다.
"괜찮으셔요?"
"괜찮지 뭐. 혼삿길이 막혔으면 시집을 가지 않음 될 일이고, 무당혼
이 씌웠으면 무당이 되면 되지 않겠니?"
"아씨도 참…."
"어쨌든 좋다. 오늘 날이 맑은 듯한데, 우리 함께 나들이나 가자꾸
나."
"어디로 갈까요?"
"개경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는 천마산(天磨山)이 어떻겠니? 거기에
박연폭포(朴淵瀑布)가 좋다 하더라."
"그렇게나 멀리요?"
"가자. 거기 가면 마음이 씻겨질 거다. 그럼 나는 새로 태어날 수 있
을 걸."
꽤 오래 걸어 두 사람은 박연폭포 앞에 당도한다. 전국적인 유람지
로 소문난 박연폭포. 시원한 물줄기가 한마디로 장관이다. 저만한 물줄
기를 가진 남자라면 얼마나 속이 후련하게 살아갈까, 불쑥 그런 고약
한 생각이 든다.
"삼월아, 시 한 수 들어 보겠니?"
"예."
황진이는 삼월이를 벗삼아, 쏟아져내리는 폭포수를 바라보며 시를
읊기 시작한다.
"한 줄기 긴 폭포 산골짝에 날리고
용의 못을 이루어 넘쳐흐른다.
샘물이 거꾸로 날아가니 은하수더냐
성난 폭포 가로 비끼니 무지개더냐.
우박은 흩어지고 우뢰는 달려 산골을 채우니
구슬 찧는 방울 소리는 하늘을 울린다.
유람객들 하는 말이, 여산(廬山) 경치 좋다지만
해동(海東)의 천마산(天磨山)이 으뜸인 줄 아시오."
시를 읊으며 시름을 달래던 황진이는, 저편에서 한떼의 유람객이 놀
고 있는 장면을 발견한다. 정자처럼 너르고 편편한 바위 위에 돗자리
를 깔고 앉은 대여섯 명의 선비 가운데서 두 기생이 술시중을 들고 있
다. 그 가운데 한 기생이 맑고 고운 목소리로 가락을 뽑는다.
"돌아가리오
전원(田園)이 비로소 황폐해 가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마음이 이미 모양에 기울었으니
어찌 근심하고 슬퍼만 하리오
지난날의 과오를 깨달았으니
이제야 갈 곳을 알겠구나"
황진이의 맑은 눈이 반짝 빛난다. 폭포수 아래서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詞)'를 부르는 기생의 모습이 더 이상 아름다울 데가
없다고 느꼈던 모양이다. 하지만 황진이가 그런 모습을 한다면 더욱
빼어날 것이다. 황진이는 불쑥 그 생각이 들었는지,
"그만 내려가자."
삼월이에게 말하고는 아담한 몸을 일으킨다.
나는 다시 리모콘으로 화면을 지운다.
"집으로 돌아간 황진이는, 며칠 동안 고민고민하다가 기어코 교방(敎
坊)을 찾아갔습니다. 그러고는 기적(妓籍)에 명월(明月)이란 이름을 올
리고 입적(入籍)을 하였습니다. 이 때, 왜 진사댁 규수가 기생이 되려
하느냐고 교방 관속이 황진이에게 묻자, 황진이는 그 자리에서 명언
한마디를 남겼습니다. 왕후장상(王侯將相:제왕과 제후, 장수와 재상을
아울러 일컫는 말)의 씨가 따로 있지 않은데, 하물며 기생의 종자가 따
로 있으리까? 어쨌든 황진이가 기생이 되었다는 소문이야말로 송도의
가장 큰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럼 다시 화면을 보십시오. 기생이
된 황진이가, 과연 어느 누구에게 자신의 알몸과 신비로운 입술이며
혀끝을 맡길까요?"
나는 다시 리모콘으로 화면을 살린다.
유명한 풍류쟁이로 일컬어지는 개성(開城) 유수(留守) 송원준(宋元
俊)이 주객(酒客)들과 함께 방안에 앉아 있다. 잠시 후에 방문이 열리
고 황진이를 비롯한 기생들이 들어선다. 기생 명월이로 다시 태어난
황진이. 법도대로 현신(現身) 절차를 밟기 위한 것이다.
"오! 과연 놀랍도다!"
"내 이만큼 눈이 커진 일이 없소!"
"방안이 이렇듯 환해지다니…."
송원준과 그의 주객들은 모두들 크게 놀란다. 황진이만한 미색(美色)
을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황진이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눈을 가
볍게 감았다 뜨며 입을 연다.
"신출 기생 명월이, 사또님께 큰절 올리나이다."
목소리는 낭랑하여 남성의 가슴을 혀로 핥아내는 듯한데, 더욱이 절
하는 모습은 사뿐 내려앉는 배추흰나비처럼 가볍고 곱다.
"네가 바로 황진이란 말인가?"
송원준이 군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묻는다.
"그렇사옵니다."
"과연 아름답도다. 벗겨 놓으면 금강산의 절경이 따로 없을 것 같구
나."
"이대로는 금강산에 견주지 못하옵니까?"
"금강산은 옷을 입지 않았으니 하는 말이로다. 저쪽만 벗고 있으면
저쪽이 불쾌하지 않겠느냐."
"사또, 심술궂사옵니다."
"허허, 그래. 어쨌거나 양귀비가 살아 있다 한들 너만이야 하겠느냐."
"소녀, 부끄럽사옵니다."
"허허, 볼을 붉히니 더 보기 좋구나."
"이제 칭찬 그만 두시고 한 잔 받으시어요."
황진이가 술을 차례차례 올리는 동안, 술을 받는 주객들은 하나같이
잔에 눈을 두지 못하고 황진이의 얼굴이며 백옥 같은 목줄기에 두고
있다. 그녀의 목줄기가 안주라면 핥아 먹고 싶다는 눈빛들이다. 그래서
하나같이 술들을 흘린다.
<다음호에는 제6화 '굿모닝 클레오파트라'가 이어집니다>
기생으로 변신한 황진이는 과연 누구를 첫 섹스 파트너로 삼게 되는
지, 그리고 서기 1990년대의 시인 관박식은 황진이의 몸과 마음을 가
져오는 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기대하십시오. 이어서 클레오
파트라가 등장합니다. 클레오파트라의 성생활은? 그리고 1996년의 어
느 남자와 관계를 하게 될까요? 또한 마릴린 먼로의 성생활은 아직 끝
나지 않았습니다. 먼로는 어떻게 죽었을까요? 또 있군요. 백국남은 심
청이와 심학규를 과연 1996년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요? 옹녀는 내내
얌전히 앉아 있군요…글쎄요?
제 목 : 김선영 신세대 패러디 소설 제6화 굿모닝 클레오파트라
"그것 참 이상하구나."
송원준이 잔을 기울이다 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묻는다.
"그대와 같은 미색이 어찌하여 근사한 지아비를 맞아 살려고 하지
않고 기생이 되었더란 말이냐?"
"여자가 본디 꽃이라면 그러하겠지요. 그러하면 먼저 꺾는 사람의
소유가 될 테니까요. 하지만 소녀는 나비이옵니다. 이 꽃 저 꽃 자유
롭게 날아다니는 나비 말이옵니다."
"그것은 풍류남아가 할 일이 아니더냐?"
"풍류남아와 어울리며 살고 싶다는 뜻이옵니다."
"이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만한 난
리가 더 없겠구나. 그래, 어쨌든 너는 이제 명기(名妓)가 되려 현신하
였으니, 어디 너의 노래 솜씨 좀 들어보자꾸나."
"재주는 없으나 강호별곡(江湖別曲)을 한번 불러올리겠나이다."
"흠…"
황진이는 옆의 다른 기생이 내밀어 준 거문고를 끌어당겨 스르릉
줄을 고르고 나서 목을 연다.
"세상 공명은 뜬구름이니
강호의 낚시꾼 되오리라.
일엽 편주 홀로 되어
임 계신 곳 가올 적에
만경 창파 넓은 물을
끝도 없이 떠나간다…"
어느덧 좌중은 모두 넋이 나가 있다.
이윽고 첫닭이 목을 비트는 새벽. 주객들은 날이 샐세라 취한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기생들의 부축을 받아 저마다 방을 찾아 간
다. 송원준의 차지는 황진이.
"우리도 금침(衾枕)에 드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송원준은 속삭이듯이 물으며 황진이의 허리를 껴안는다. 그러나 황
진이는 송원준의 팔을 풀어내며 말한다.
"사또의 금침을 지키는 천하절색의 미인이 계시다고 소녀는 들었사
온데, 사또께선 어찌하여 소녀의 수청이 필요하다 하십니까?"
송원준의 소실을 두고 하는 말.
"하하하하. 이 세상에 열 계집을 마다하는 사내가 있더란 말이냐?
하물며 황진이를 열 계집과 비교할 수 있을소냐!"
"하오나, 소녀는 하필 월경중이오라 밥상에 오를 수 없는 것이 유
감이옵니다."
"흐음…"
송원준은 사또의 체면을 차리느라 그러는지 더 조르지 못한다.
"사또. 소녀는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나는 리모콘을 작동하며 화면을 지운다.
좀 싱겁다. 싱겁기는 관박식 씨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잔뜩 기대
했을 장면이 나오지 않았으니 당연히 섭섭할 것이다.
"아무튼 황진이가 송원준의 수청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
졌습니다. 그러자 황진이의 머리을얹어 주겠다는 사람이 줄을 섰습니
다. 만금을 주겠다거나, 고대광실(규모가 굉장히 크고 좋은 집)에 들
어가 함께 살자거나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황진이로서는 오히려
귀찮기만 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스스로 머리를 틀어
얹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화면을 보십시오. 이번엔 좀 다를 겁니다."
나는 다시 리모콘을 작동하여 화면을 연다.
박연폭포 나들이를 마치고 황진이는 송악산(松岳山)엘 오른다. 달이
떠오르는 시각, 그녀는 나귀를 소나무에 매어 놓고 벼랑 위에 서 있
는 무상정(無常亭)으로 올라간다. 그러고는 난간에 기대어 한없이 외
로운 표정을 짓는다. 곧 그녀의 입에서 시 한 수가 흘러나온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
주야(晝夜)로 흘러가니 옛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서 가고 아니 오더라."
그때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퉁소 소리. 끊길 듯 이어지는 가락이 흐
느낌처럼 애절하다.
"누굴까?"
황진이는 퉁소 소리에 이끌리어 무상정에서 내려선다.
"아!"
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저만치 앞에서 한 사나이가 달빛 속에 앉
아 눈을 감은 채 퉁소를 불고 있다. 남루한 옷차림에 창백한 얼굴. 그
러나 흔한 사람은 아닌 듯하다.
황진이는 소나무 뒤에 서서 몸을 가리고 그 사나이를 한동안 바라
본다. 갑자기 퉁소 소리가 끊긴다 싶더니, 사나이가 얼굴을 돌린다.
소나무 옆으로 나와 있는 황진이의 얼굴과 마주친다. 순간 황진이는
자신의 가슴에 파도 무늬가 그려지는 것을 느끼면서 소나무 뒤에서
벗어난다. 그러곤 가볍게 목례를 하며 입을 연다.
"퉁소 소리가 너무도 애절한지라 몰래 엿듣고 있었습니다. 방해가
되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사나이는 몸을 일으키더니 몇 걸음 다가와 묻는다.
"해가 떨어진 시각에 부인 혼자 산에 오르다니, 두렵지도 않으시
오?"
"탐관오리들도 감히 어쩌지 못한 몸이온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으흠…대관절 누구신데 그렇듯 배짱이 두둑하시오?"
황진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한다.
"송도 기생 명월이라 하옵니다."
"명월이라 했소? 그렇다면 그대가 바로 저 유명한 황진이란 말이
오?"
"그렇다고들 합니다."
"진정으로 반갑소. 이처럼 뜻밖에 그대를 만나다니,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나에게 행운을 베풀어 주심이 아니고 무어겠소?"
"그런데 누구시옵니까?"
"나는 양주땅 사람으로 김경원(金慶元)이라 하오. 뜬구름처럼 떠돌
아다니기를 즐긴다고 하여 부운거사(浮雲居士)라고들 부른다오."
"그렇다면 오늘은 어디로 떠도는 길이십니까?"
"단풍놀이를 하려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참이었소."
"오늘 밤 묵으실 거처는 정하셨는지요?"
"동쪽에서 자고 서쪽에서 먹는 사람인 내가 숙소를 미리 정해 놓을
리가 없지 않겠소. 달빛 아래서 시를 읊다가 쓰러져 자면 거기가 바
로 숙소요."
김경원은 더 이상 태평스러울 데가 없는 표정으로 말하고 나서 시
를 읊기 시작한다.
"달은 천심(天心)에 이르고
바람이 수면(水面)에 앉을 때
이처럼 깨끗한 마음
아는 이 몇이나 되리오?"
당나라 시인 소강절의 '청야음(淸夜吟)'이다. 그러자 이번엔 황진이
가 응대하여 시 한 수를 읊는다.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스님은 약을 캐러 산으로 갔다 하네.
산중에 계실 것은 틀림없으나
구름이 깊으니 간 곳을 알 길 없네."
당나라 승려 무본이 지은 시다.
"소문에 들어 그대의 재주가 뛰어남을 알고는 있지만 당시(唐詩)에
도 밝은 줄은 미처 몰랐었소. 그렇다면 이제 나는 갈 길을 가야겠군."
김경원은 괴나리봇짐을 양 어깨에 건다.
"왜 갑자기 서둘러 떠나려 하시는지요?"
"그대가 명기임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족하오. 내가 더 이상 송도
에 머물러 있을 까닭이 없소 그려."
"아무리 천하 명기라 해도 자기의 갈 길을 멈출 수는 없다는 뜻이
옵니까?"
"눈치가 역시 빠르구료."
김경원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비탈길을 따라 성큼 걸음으로 내
려간다. 황진이의 얼굴에 무시당한 표정이 역력하다. 그녀의 미색에
넋을 잃지 않은 자가 없는데 김경원이 처음으로 콧대를 꺾은 것이다.
"잠깐만요!"
황진이는 황급히 김경원의 뒤를 쫓아 내려가며 소리친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따지듯이 말한다.
"아무리 우연히 만났기로서니 너무하십니다."
"뭐가 너무하단 말이오?"
"불가(佛家)에서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상견례마저 나누었는데 저 혼자 산중에 남겨 두고 떠나가십니까?"
"저런…그대는 내가 뜬구름인 줄 몰랐단 말이오? 송도 제일의 명기
라 일컫는 황진이를 보았으니 내가 더 이상 이고장에 머물 일이 없지
않겠소? 나를 말린다면 그대보다 뛰어난 기생이 따로 있어 소개하려
하기라도 한단 말이오?"
"그런 말씀이 아니오라…아무리 뜬구름이라 하여도 간혹 멈추어 소
나기라도 뿌리고 가는 법인데, 오늘밤만큼이라도 소녀의 집에 머물며
약주 한잔 하시고 가시는 게 어떠하실는지요?"
뜻밖의 제의가 아닐 수 없다.
"그것 참…"
시큰둥해 하는 것 같지만 김경원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흐르고
있다.
어느덧 황진이의 나이도 18세. 그녀는 마침내 한 남정네에게 그 동
안 고이 간직해 온 순결을 바치려 함인가?
황진이는 약속대로 김경원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러
고는 그만한 정성이 없을 듯싶은 주안상(酒案床)을 스스로 차려 가지
고 방안으로 들어온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두 사람 다 볼이 붉
게 달아오른다.
"춘면곡(春眠曲) 한 수 들으시어요."
황진이는 잠시 몸을 일으켜 윗목에 놓여 있던 거문고를 가져오더니
곡을 뜯기 시작한다. 그녀의 입에서는 선율에 맞게 고운 목소리가 흘
러나온다.
"춘면(春眠)을 느직이 깨어 죽창(竹窓)을 반쯤 여니
뜰에 핀 꽃 작작(灼灼)하여 가는 나비 머무는 듯
언덕에 핀 버드나무는 성긴 내를 띠었구나…
맑은 노래 한 곡으로 춘흥(春興)을 자아내니
운우(雲雨) 양대(陽臺)에 초몽(楚夢)이 다정토다.
사랑도 그지없고 연분도 깊을시고
이 사랑의 연분은 비할 데가 없구나."
춘면곡을 듣던 김경원이 무릎을 친다.
"옳거니! 나도 한 곡 들려 드리지 않을 수 없지."
김경원의 입에서 구성진 소리가 나온다. 청산별곡(靑山別曲)이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울어라 울어라 새여
자고 일어 울어라 새여
널보다 시름한 나도
자고 일어 우리로다
얄리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
그즈음 황진이의 몸이 기울고 있다. 술에 취해 기우는 것이 아니다.
남자에 취해 기우는 것이다. 김경원은 황진이의 몸을 안고 옆으로 기
운다. 기우는 듯싶더니 천천히 그녀의 옷고름을 풀고 치마저고리를
벗겨 가기 시작한다. 부드러운 김경원의 손길은 한두 번 여인의 몸을
품어 본 솜씨가 아니다.
이윽고 전라가 되자 김경원이 군침부터 삼킨다.
"훌륭한 몸이오."
훌륭한 몸이라고 생각하기는 그들을 엿보고 있는 나 역시 마찬가지
다. 옆에서 민망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는 옹녀에게는 미안한 노릇이
지만 나의 남성은 어쩔 수 없다. 시인 관박식 씨도 표정으로 보아서
그러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김경원은 황진이의 몸을 입술과 혀끝으로 구석구석 애무하다가, 이
번엔 아예 그녀의 젖가슴에만 얼굴을 묻고 신음을 토해낸다. 이제껏
그만한 가슴을 느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어머니의 젖가슴에 파묻
힌 어린아이처럼.
그러다가 더 버티기가 어려운지 마침내 정상 체위로 그녀의 몸을
공략한다. 순간,
"아악!"
하는 신음 소리가 거의 비명에 가깝다. 마침내 황진이의 순결이 함
락되었음이다. 황진이의 처녀막이 파열되면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희디흰 허벅지를 타고 흐르고 있다. 비록 영상이지만 황진이만의 독
특한 피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그쯤에서 리모콘을 작동하여 벽면의 화면을 지운다.
"어떠십니까?"
시인 관박식에게 내가 묻는다.
"어쩐지 황진이가 나약한 여성처럼 느껴지는군요."
관박식은 김경원에게 순결을 내어 준 황진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저 작자들은 며칠이나 저 짓을 합니까?"
"예. 사흘 동안 김경원은 황진이의 집에 머물면서 그녀를 공략합니
다. 아니, 어쩌면 황진이가 김경원을 공략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그런
데 사흘 뒤에 김경원은 황진이의 곁을 떠나가려 합니다. 그 대화 장
면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럽시다."
나는 다시 리모콘을 작동시켜 벽면에 화면을 만들어낸다.
김경원이 행장을 꾸리고 있다.
"또다시 뜬구름이 되려고 하십니까?"
황진이가 울상이 되어 묻는다.
"이제 우리의 인연은 이쯤에서 끝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몸이
근질거려 더 이상 이곳에만 머물러 있을 수가 없네."
여자의 몸을 차지하고 나니 말이 내려지는 모양이다. 불쌍한 황진
이, 울컥 치미는 듯한 말을 내뱉는다.
"저를 버리고 떠나신다니요?"
"그대를 가진 일이 없는데, 내 어찌 그대를 버릴 수가 있단 말인
가?"
"거사께선 저의 순결을 가져가지 않으셨습니까."
"허허. 내가 언제 그대의 순결을 강제로 달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대는 명색이 기생이거늘, 어찌하여 육신을 순결을 따지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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